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힌골 전투 (문단 편집) === 소련군의 8월 공세 === 소련군은 일본군의 공세를 분쇄하면서, 한편으로는 반격을 위해 계속 [[유럽]] 방면에서 오는 증원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. 이것은 주코프의 장기로서, [[모스크바 전투]]나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, [[쿠르스크 전투]]에서도 나타났듯 처음에 수비로 적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렸다가 적이 기진맥진했을 때 파멸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. 준비가 끝난 8월 20일, 마침내 소련군은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. 이 때 소련군은 대규모 지원 포격과 함께 기갑여단 3부대와 기계화여단 2부대가 할하 강을 건너 일본군에 대한 양익 포위에 성공했고, 그 결과 선두에 있던 일본군 제23사단을 비롯한 제6군 전체가 포위망에 걸렸다. 이 중에서 제23사단은 끝내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[[전멸]]했다.[* 근현대전에서 군사적 의미의 [[전멸]]은 문자 그대로의 몰살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해당 부대가 더 이상 전투부대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, 즉 '''무력화'''되었다고 판정받은 것을 의미한다. 대개 일반적인 국가의 군대에서는 전체 병력 중 30%가 사상자(1개 사단 기준으로 전사 500~600명, 부상자 2,500여 명)일 경우 전멸로 분류하여 그 즉시 재편성하도록 조치한다. [[대한민국 국군]]도 40%가 기준이다. 그런데 당시 제23사단은 전체 전력의 '''70%''' 가량을 상실했으므로 전멸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.] 결국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. [[파일:attachment/Khalkhin_Gol_Captured_Japanese_soldiers_1939.jpg]] ▲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일본군 병사들 하지만 소련군은 원래의 국경이던 할힌골에서 진격을 멈추었고, 전투는 이것으로 끝났다. 관동군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고, 소련도 다가오는 [[동유럽]]에서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. 할힌골 전투가 끝난 다음날인 9월 1일은 바로 [[폴란드 침공|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]]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시작된 날이었고, 9월 17일에는 소련 역시 폴란드를 공격했다. 이런 이유로 인해 소련 역시 전투를 계속할 의사가 없었다. 원래 소련은 이 지역에서 영토(그것도 소련이 아닌 몽골의 영토)를 확대할 의도까지는 없었으므로 일본군을 격파한 시점에서 전투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. 그 결과 사소한 국경 문제에서 관동군과 소련군 사이의 대규모 결전으로 비화된 이 전투는 다시 사소한 국경 문제로 끝났다. [[파일:attachment/seihoryo2.jpg]] ▲ 1939년 10월 강화 후 포로 교환을 마치고 기념 사진을 촬영한 소련군-일본군 장교들 그런데 관동군은 소련군이 진격을 멈춘 후에도 '''정신을 못 차리고'''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분쟁 지역에 계속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. 이때 증원으로 온 제7사단뿐만 아니라 제2, 4사단까지 파견하고 중앙에는 '전사자 수용을 위한 한정 작전'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. 일본군 대본영은 깜짝 놀라서 나카지마 테츠조 참모차장을 파견하였으나 [[스톡홀름 증후군|참모차장도 관동군에 설득되어]] 이를 추진한다. 대본영은 다시 연락장교를 보내서 거듭 중지를 명령했고, 그제서야 관동군은 공세를 포기하였다. 이후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총사령관과 이소가이 렌스케 [[참모장]], 핫토리 타쿠시로 작전참모, 그리고 고마츠바라 제23사단장뿐만 아니라 공세를 중지시키려다가 오히려 설득된 나카지마 참모차장도 예비역으로 예편당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